한국학술협의회에서 1998년부터 대우재단의 학술사업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데넷 Daniel C. Dennet 교수(1942~)
오늘날 인지과학과 심리철학 영역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는 세계적인 철학자. 반형이상학적, 반본질주의적, 반결정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의식에 대해 탈신비화된 설명을 시도한다. 신경과학, 언어학, 인공지능, 컴퓨터 과학, 심리학, 두뇌 생리학 등 최신 자연과학의 성과를 철학연구에 반영하여 철학적 문제 및 철학자의 역할을 재정립한 석학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 약력
- 1942년 미국 보스턴 출생
-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어바인) 교수 역임
- 미국 보스턴 컴퓨터 과학 박물관, 스미소니언 과학박물관 전시 기획 참여
- 현재 미국 터프츠 대학 유니버시티 프로페서
- 현재 미국 터프츠 대학 인지연구소 소장
■ 주요저서
- Content and Consciousness (1969)
- Brainstorms (1978)
- Mind‘s I (1981)
- The Intentional Stance (1987)
- Consciousness Explained (1991)
- Darwin's Dangerous Idea (1995)
- Kinds of Minds (1996) [마음의 진화]로 국내번역
[전체개요] 의식의 과학적 탐구: 철학적 장애를 넘어서서
의식을 신비로운 마술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의식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진짜로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무대 마술을 피상적으로 보면, 정말로 놀랍고 신비해 보인다. 그러나 무대 마술의 놀라운 효과는 마술사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다. 실지로 무대 마술의 효과가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는지를 이해하고 나면, 마술은 더 이상 신비할 것이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마술??도 이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한에서만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현상일 뿐이다. 두뇌가 어떻게 의식을 일으키는지를 이해하고 나면, 의식 또한 결코 불가사의한 현상이 아니다.
데넷은 의식 현상을 과학적으로 탐구될 수 없는 신비로 간주하는 기존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의식이 신비롭다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의식에 대한 1인칭적 접근법과 2인칭적 접근법을 비판하고 그가 중립현상학Heterophenomemology이라 부르는 객관주의적 3인칭적 접근법을 통해 의식 현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뇌가 어떤 방식으로 신비롭게만 느껴지는 의식현상을 일으키는지를 설명하고, 의식 주체는 해체되어야 하며, 의식 현상은 각각의 임무를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두뇌 속의 기관들의 총체적 기능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미나1 개요] 로봇 메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What Mary the Robot Knows
잭슨은 그의 “매리 사유 실험”이 물리주의가 거짓이라는 것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논문은 매리 사유 실험이 반물리주의적 전제나 제약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인다. 첫째, “색채 시각 경험이 무엇 같은 것일지에 대한 기술은 사적인 지시사를 사용하지 않고 어렵다 라는 부인 할 수 없는 주장”과 “그러한 사적인 지시사는 엄밀하게 말하여 제거할 수 없다 라는 거창한 주장”과의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만일 삼각형 시각 경험이 무엇 같을 것인지를 20-30문장으로 적합하게 기술할 수 있고 5월 달밤의 파리의 시각 경험이 무엇 같을 것인지를 2000-30000문장으로 기술할 수 있다면, 청색 시각 경험이 무엇 같을 것인지는 2백만-10억 문장으로도 기술할 수 없다고 하기 어렵다. 삼각형 시각 경험과 색채 시각 경험은 지속적인 것이다. 둘째, 잭슨의 추종자들은 “빨강의 경험으로 간주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빨강을 보는 것이 무엇 같은 것일지를 아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상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목전의 문제를 과학적으로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일 뿐이다. 셋째, 반물리주의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다른 매리, “로보매리”로 사유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보매리는 천연색 카메라로 장착하여 프로그라밍되고 작동되는 마크 19 로봇과 모든 것이 같지만 흑백 카메라로 장착된 것만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다. 로보매리는 잭슨의 매리처럼 색채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크 19 로봇의 색채 시각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 뿐 아니라 일백만 색채 해독체계를 구성하고 마크 19 로봇의 색채 시각 판본에 도달하고 흑백 카메라로 입력한 것들을 색채 구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보매리가 어느 날 천연색 카메라를 장착하였을 때 로보매리가 놀라지 않는 까닭은 “색채를 보는 것이 무엇 같은 것”일지를 정확히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미나2 개요] 자유의지에 대해 인지과학이 말해 주는 것 When-and Where-do we decide?
사람은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고, 그 능력에 걸맞는 책임을 지게 된다. Benjamin Libet을 비롯한 몇몇 신경과학자들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러한 믿음을, 명민하게 고안된 그들의 실험실로 데려가서, i) 우리가 의식적으로 움직이려 결정하기 이전에(300~500ms) 이미 두뇌는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으며, ii) 이 같은 연구결과는 우리가 무엇을 ‘할 자유의지(free will)'를 가진다기 보다는 ’하지 않을 자유의지(free won't)'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득한다. 이 발표에서는, 그들의 연구 바탕에 놓인 가정들을 들추어내고 그 같은 연구결과에 대해 가능한 대안적 가설들을 검토함으로써, Libet 등이 우리에게 권장한 ‘이해’가 실은, 두뇌에 의식적 처리를 도맡으며 특권적 지위를 갖는 데까르트적인 자리가 있으며, 의식적 결정은 어느 한 특정시점 t에 빚어진다는 역사적 연원이 깊은 ‘오해’에서 빚어진 것임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세미나3 개요] 인생을 살 만하게 하는 것이 '퀄리아'일까? Are qualia what make life worth living?
퀄리아(감각질)는 오직 체험 주체만이 접근할 수 있는 완벽히 사적인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철학자들은 퀄리아의 존재의의를 확인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가끔 좀비와 같이 객관적인 행태에 있어서는 산 사람과 다름없지만 그 의식 내부에 퀄리아가 전혀 없는 가상적 존재를 상정해 사람과 비교하기도 한다. 이런 비교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좀비로 살기보다는 사람으로 살기를 택할 터인데 그 선택은 오직 퀄리아의 존재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퀄리아야 말로 사람에게 삶의 의의를 부여해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퀄리아가 정작 어떤 것인지 그 정체가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퀄리아는 주체 만이 접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나 주체의 의식이 접근 못하는 체험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렌싱크의 시각차단 실험에서 확인되듯 주체의 체험 영역도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이 구별될 수 있는데, 그 중 의식된 일부만을 퀄리아라고 하는지 아니면 무의식적인 것까지 포함한 전부를 퀄리아라고 하는지 불분명하다. 또한 프로소파그노시아나
[세미나4 개요] 두뇌 속의 명성으로서의 의식 Consciousness as Fame in the Brain
데넷은 의식을 명성 혹은 정치적 영향력과 유비하여 자신이 제안하였던 의식 이론인 다수 초고 모델 (the Multiple Drafts Model)을 재조명하고 새로이 옹호하고자 한다. 유비의 핵심적인 내용은 명성이란 어떤 사람이 가지는 특별한 성질이 아니고 명성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 (광고에 나가고,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등등)가 본질이듯이 의식도 두뇌의 어떤 정보상태가 가진 특수한 성질 - 감각질과 같은 - 이 아니라 그 정보가 두뇌의 여러 다양한 기관에 전달이 될 수 있는 메아리와 같은 성향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뇌신경학의 최근 성과를 소개하고 있으며 특히 드헤이니와 나카쉐의 광역작업장 모델이 주목을 받고있다. 그러나 데넷에 따르면 의식을 가능케 하는 기재가 두뇌의 어떤 특정한 기관에 선천적으로 장착되어 있지는 않고 오히려 문화적으로 전수되고 배양되는 자기자극의 습관에 기인한다고 하는데 이 주장은 데넷 자신이 고려하고 있는 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의식이 문화의 산물일 수 없다는 비판과 함께, 자신의 이론이 다루는 의식이란 단지 한 종류의 의식일 뿐이라는 비판도 블락의 현상적 의식과의 연관 하에서 다루고 있다.
[공개강연1 개요] 의식에 대한 삼인칭적 접근 A third-person approach to consciousness
잭슨은 그의 “매리 사유 실험”이 물리주의가 거짓이라는 것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논문은 매리 사유 실험이 반물리주의적 전제나 제약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인다. 첫째, “색채 시각 경험이 무엇 같은 것일지에 대한 기술은 사적인 지시사를 사용하지 않고 어렵다 라는 부인 할 수 없는 주장”과 “그러한 사적인 지시사는 엄밀하게 말하여 제거할 수 없다 라는 거창한 주장”과의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만일 삼각형 시각 경험이 무엇 같을 것인지를 20-30문장으로 적합하게 기술할 수 있고 5월 달밤의 파리의 시각 경험이 무엇 같을 것인지를 2000-30000문장으로 기술할 수 있다면, 청색 시각 경험이 무엇 같을 것인지는 2백만-10억 문장으로도 기술할 수 없다고 하기 어렵다. 삼각형 시각 경험과 색채 시각 경험은 지속적인 것이다. 둘째, 잭슨의 추종자들은 “빨강의 경험으로 간주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빨강을 보는 것이 무엇 같은 것일지를 아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상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목전의 문제를 과학적으로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일 뿐이다. 셋째, 반물리주의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다른 매리, “로보매리”로 사유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보매리는 천연색 카메라로 장착하여 프로그라밍되고 작동되는 마크 19 로봇과 모든 것이 같지만 흑백 카메라로 장착된 것만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다. 로보매리는 잭슨의 매리처럼 색채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크 19 로봇의 색채 시각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 뿐 아니라 일백만 색채 해독체계를 구성하고 마크 19 로봇의 색채 시각 판본에 도달하고 흑백 카메라로 입력한 것들을 색채 구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보매리가 어느 날 천연색 카메라를 장착하였을 때 로보매리가 놀라지 않는 까닭은 “색채를 보는 것이 무엇 같은 것”일지를 정확히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개강연2 개요] 의식의 '마술'을 설명함 Explaining the "magic" of consciousness
사람은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고, 그 능력에 걸맞는 책임을 지게 된다. Benjamin Libet을 비롯한 몇몇 신경과학자들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러한 믿음을, 명민하게 고안된 그들의 실험실로 데려가서, i) 우리가 의식적으로 움직이려 결정하기 이전에(300~500ms) 이미 두뇌는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으며, ii) 이 같은 연구결과는 우리가 무엇을 ‘할 자유의지(free will)'를 가진다기 보다는 ’하지 않을 자유의지(free won't)'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득한다. 이 발표에서는, 그들의 연구 바탕에 놓인 가정들을 들추어내고 그 같은 연구결과에 대해 가능한 대안적 가설들을 검토함으로써, Libet 등이 우리에게 권장한 ‘이해’가 실은, 두뇌에 의식적 처리를 도맡으며 특권적 지위를 갖는 데까르트적인 자리가 있으며, 의식적 결정은 어느 한 특정시점 t에 빚어진다는 역사적 연원이 깊은 ‘오해’에서 빚어진 것임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국내 지식인 사회에 인지과학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학술협의회(이사장 김용준)와 대우재단, 조선일보사가 8~9일 개최한 제3회 석학연속강좌에는 인지과학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다니엘 데넷(60) 미국 터프츠대 교수의 강연을 듣기위해 연일 500여명의 청중이 강연장을 가득 채웠다. 강원도 횡성의 민족사관고 학생 200여명이 학교 버스로 단체 상경, 강연을 들었고, 목포와 부산 등에서 올라온 청중도 눈에 띄었다. 생소한 분야로 알려진 인지과학 강연에 이런 인파가 몰린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인간 의식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넷 교수의 신(新)학문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정대현(丁大鉉)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가 데넷 교수와 대담을 나눴다.
▲정대현 〓당신은 그동안 인간의 마음에 관해서 많은 연구를 해왔다. 특히 철학자로서 당신은 인지과학에 커다란 기여를 해왔다. 인지과학이 경험과학적 논의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인지과학은 철학과 연관성이 별로 없는 것같다.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당신에게 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데넷 〓어떤 분야에서건 어떤 것이 올바른 질문인지를 모를 때 우리가 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올바른 물음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만든다. 그 분야가 자연과학이든 역사학이든, 철학은 처음에 항상 혼란스럽고 짜임새 없이 시작한다. 철학이 성공적이라면, 철학자는 어떤 질문이 좋은 것인지를 파악할 것이다. 철학의 역할은 다른 학문의 문제를 명료하게 하고, 그 논의들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것이다.
▲정 〓철학은 과학 일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특히 인지과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 데넷 〓과학과 철학은 연장선 위에 있다. 둘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없다. 어떤 철학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철학은 덜 조직화된 과학으로 본다. 지금은 심리학이 어느 정도 짜임새를 갖췄지만,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현재 철학자 중에는 인지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 〓 당신의 학문적 관심은 철학에서 인지과학으로 바뀐 것같다. 당신은 전통적인 철학의 논의에서 이탈한 것이 아닌가?
▲ 데넷 〓그렇다. 나는 철학자가 경험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미래에 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철학 이외의 다른 분야를 아주 잘 알아야 한다. 역사학이든, 심리학이든 인류학이든 상관 없다. 순수하게 철학만 공부하면, 학문적 기반이 아주 약할 것이다.
▲정 〓인지과학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데넷 〓그 용어가 생긴지도 겨우 25년 밖에 안되었다. 마음에 관심을 가진 심리학자, 언어학자, 인공지능연구자들은 자신들이 동일한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들은 학제적 연구의 학회나 연구모임에서 이런 물음들을 결합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신경과학과 뇌 연구는 인지과학에 포함되지 못했다. 신경과학자와 뇌 연구자가 마음에 대해서 논의하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과학이 인지과학의 한 가운데에 있고, 이것을 모르면 인지과학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정 〓철학자로서 당신은 인지과학을 발전시키는데 어떤 기여를 했는가?
▲ 데넷 〓나는 초창기부터 뇌 연구를 포함한 경험과학적 연구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초창기 인지과학자들의 연구 모임에 참석하면서 인지과학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그들의 연구성과를 주의깊게 연구했고, 그들과 많은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의 논의에 중요한 철학적 작업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줬으며, 자신들의 논의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그들의 물음을 명료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내가 말했던 철학적 작업이다.
▲정 〓인간과 인간 로봇의 차이는 의식의 유무에 있는가?
▲데넷 〓의식 때문에 인간과 인간 로봇의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내 의도는 의식을 신비스럽게 보는 것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으로 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 정 〓의식에 대한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가?
▲데넷 〓의식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우리에게 의식이 너무나도 친숙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로서 나의 임무는 바로 철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의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의식을 안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런데도 많은 철학자들은 그런 논의를 하고 있으며, 이런 논의로 과학자를 설득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우리의 의식에는 의식의 주체가 없다.
▲정 〓당신 주장에 따르면, 우리 몸은 수 조의 세포로 이루어진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의 집단에서 통치자가 있듯이, 수많은 세포를 조정하는 통치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데넷 〓당신이 말하듯이, 그 기계에는 당신이 말하는 통치자의 역할을 하는 통치 장치는 없다. 단지 상이한 인지 내용들 간의 작용과 반작용이 있을 뿐이다. 내가 말하는 의식의 흐름은 다양한 의식의 내용들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연속체일 뿐이다.
▲정 〓의식을 과학적으로만 분석한다면, 도대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데넷 〓삶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난 삶에서 어떤 초월적인 것을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우리 자신에게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보잘것 없어 보일는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삶에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천상의 어느 곳에 종속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우리에겐 자유가 있다. 현재의 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설정할 이유가 있는가?
정리=金基哲 기자
입력 : 2002.11.13 18:24 18' / 수정 : 2002.11.14 10:38 23'